
골든글로브 외국어 영화상 수상에 아카데미 후보까지. 저는 솔직히 처음에 "또 외국 영화제가 한국 영화를 발견했구나"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보고 나서 한참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한국 영화인지 미국 영화인지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을 정도로, 삶의 보편적인 질감을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아메리칸드림의 그림자, 그 안에 있던 아시아계 이민자
미국이 이 영화에 이토록 열광하는 이유가 뭘까요? 단순히 영화가 잘 만들어져서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라는 자부심을 오랫동안 가져왔습니다. 아메리칸드림이라는 개념은 어떤 배경에서 왔든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미국적 믿음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아메리칸드림이란 단순한 물질적 성공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이민자가 새 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서사에서 아시아계는 오랫동안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으로 타자화되어 왔던 아시아인들이 비로소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스크린에 등장했을 때, 미국 관객들이 받은 감정은 단순한 감동이 아니라 일종의 부채 의식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오리엔탈리즘이란 서구가 아시아를 신비롭고 이국적이며 열등한 타자로 규정해 온 시각 구조를 뜻합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이론화한 개념으로, 대중문화 속 아시아인 표현 방식에 지금도 뿌리 깊게 남아 있습니다. 미국 내 아시아계 인구의 문화적 가시성이 높아진 것은 분명 긍정적인 변화입니다. 실제로 미국 인구조사국에 따르면 아시아계 미국인 인구는 2020년 기준 약 2,4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7.2%에 달합니다. 이 숫자가 말해주는 것은, 미나리 같은 이야기가 얼마나 오래 기다려온 서사인지입니다. 저는 이 지점이 조금 복잡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제야 우리를 보기 시작했구나"라는 안도감과, "왜 이제야"라는 씁쓸함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제이콥 가족의 아칸소 정착기, 그리고 가족 갈등의 민낯
영화의 핵심은 결국 가족입니다. 그런데 이 가족이 얼마나 솔직하게 그려지는지를 보셨나요? 제이콥은 아칸소 땅에서 한국 채소 농사를 지으며 성공하겠다는 꿈을 품습니다. 트레일러를 개조한 집에서 시작하는 이 가족의 출발점은 초라합니다. 하지만 제이콥에게 그것은 가능성입니다.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며 생계를 꾸리는 그의 모습은, 당시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감수해야 했던 직업적 현실을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처음 들어갔을 때, 기대와 현실의 간극이 클수록 버티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됩니다. 제이콥이 "캘리포니아에서는 부족하지만 아칸소에서는 괜찮다"라고 말하는 대사에서 저는 웃음이 나왔지만, 동시에 마음이 짠했습니다. 그 말 안에 얼마나 많은 체념과 자기 위로가 담겨 있는지 알 것 같았거든요. 모니카가 제이콥에게 원하는 것은 단순합니다. "가족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 한마디입니다. 그런데 제이콥은 그 말을 하지 못합니다. 목표에 몰두하느라 곁에 있는 사람을 충분히 보지 못하는 것, 저도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그게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는지 깨달았습니다. 이 네 사람이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결국 함께 버티는 과정이 이 영화의 진짜 줄기입니다.
순자와 데이빗, 그리고 미나리가 상징하는 것
할머니가 손주를 예뻐하는 모습은 동서고금 어디서나 비슷합니다. 그런데 순자와 데이빗의 관계는 조금 다르게 그려집니다. 데이빗은 순자에게 "할머니는 할머니 같지가 않다"라고 말합니다. 이 대사가 저는 꽤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데이빗에게 익숙한 그랜마의 이미지와 한국에서 온 순자는 전혀 달랐을 겁니다. 화투를 치고, 욕을 하고, 고추장을 짐짝처럼 들고 오는 할머니. 처음에는 낯설지만, 결국 가장 깊이 연결되는 사람이 됩니다. 제가 어릴 때 할머니와 보냈던 시간도 그랬습니다. 특별한 것을 해줘서가 아니라, 그냥 곁에 있어줬다는 기억이 남습니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미나리는 단순한 식물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내러티브 장치로서 미나리는 가족 전체의 운명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내러티브 장치란 감독이 이야기의 주제를 시각적, 상징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소재나 요소를 말합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한 번 자리 잡으면 강하게 번지는 미나리의 특성은 이민자 가족의 생존 방식과 정확히 겹칩니다. 순자의 실수로 집에 불이 납니다. 삶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같은 시점에 데이빗의 심장은 기적처럼 나아지고 있습니다. 미나리가 결국 자라듯, 이 가족도 그렇게 버팁니다. 리 아이삭 정 감독의 반자전적 연출이 빛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반자전적이란 감독 자신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하되, 일부는 각색하거나 재구성한 방식의 창작을 뜻합니다. 스티븐 연의 한국어 연기는 제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미국에서 자란 배우가 저 정도의 자연스러운 한국어 감정 연기를 해낸다는 것이 솔직히 놀라웠습니다. 한예리의 연기도 인상 깊었는데, 특히 비닐봉지에 싸 온 친정 음식을 보며 눈물 흘리는 장면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정확하게 담아냈습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미나리는 2021년 기준 국내외 총 누적 관객 수에서 한국계 이민자 소재 영화 중 가장 높은 해외 흥행 성과를 기록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미나리는 극적인 전개보다는 일상의 감정을 천천히 쌓아가는 방식이라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저도 중반부에 호흡이 길다고 느낀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이 영화의 힘이기도 합니다. 화려한 사건 없이도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영화가 드문데, 미나리는 그것을 해냅니다. 낯선 땅에서 뿌리를 내리려는 사람이라면, 국적을 불문하고 이 영화 앞에서 한 번쯤 멈추게 될 것입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지금이 딱 좋은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