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버넌트를 보기 전에는 단순한 생존 액션물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곰한테 물어뜯기고, 눈밭을 기어 다니는 영화 정도로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보고 나서는 한동안 멍했습니다. 그게 제가 이 영화를 다시 들여다보게 된 계기였습니다.
롱테이크가 만든 몰입,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대비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촬영 방식입니다.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자연광만을 사용해 영화 전체를 찍었습니다. 자연광이란 태양이나 달 같은 인공조명이 아닌 빛만을 촬영 광원으로 활용하는 방식인데, 이렇게 하면 세트 조명의 인위성이 사라지고 장면 자체가 날것처럼 느껴집니다. 실제로 제가 영화를 보면서 유독 화면이 '반들반들하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롱테이크 기법이 영화 전반을 지배합니다. 컷을 끊지 않고 카메라를 오래 돌려 한 장면을 연속으로 담는 촬영 방식으로, 몽타주처럼 장면을 인위적으로 이어 붙이지 않기 때문에 관객이 그 순간을 함께 경험하는 듯한 생생함을 줍니다. 초반 인디언 습격 씬과 곰 격투 씬이 대표적인데, 저는 그 장면들을 보면서 호흡이 가빠지는 걸 느꼈습니다. 단순히 편집이 빠른 액션이 아니라, 카메라가 함께 달리고 쓰러지니까요. 그런데 흥미로운 지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안에는 사실 상당한 인위성이 숨어 있습니다. 보여줄 것과 보여주지 않을 것이 굉장히 구조적으로 설계되어 있거든요. 저는 처음엔 그게 단점처럼 느껴졌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 계산된 인위성이 오히려 서사를 밀고 나가는 힘이었습니다. 사실성과 서사의 구조성이 공존하는 방식, 이냐리투가 전작 버드맨에서 이미 한 번 실험하고 나서 서부 개척 시대의 자연으로 옮겨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연을 담은 숏들도 남달랐습니다. 일반적으로 익스트림 롱 숏은 장소나 시간의 전환을 알리는 설정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그 숏 자체가 하나의 주인공처럼 느껴졌습니다. 탐미적으로 구도를 잡아 그림같이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냥 카메라를 들이댄 것처럼 밋밋하게 보이는 자연 풍광이 많았습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그 밋밋함이 오히려 자연을 더 크게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꾸미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진짜처럼 느껴졌습니다. 영화에서 음악의 역할도 제가 특히 주목한 부분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대사가 극히 적은데도, 화면에서 음악이 거의 끊기지 않습니다. 곰이 나타나기 전 낮게 깔리는 저음, 인물 간 긴장이 고조될 때의 갑작스러운 전환, 이 모든 것이 대사 없이 인물의 내면을 전달합니다. 시각이 자연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음악은 인간의 이야기를 하는 구조입니다. 저는 이 영화가 촬영상뿐 아니라 음악상 후보에도 올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종성과 혼종성, 이냐리투가 미국에 던진 질문
이냐리투는 멕시코 출신 감독입니다. 그가 미국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선택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서사 핵심은 혼혈 아들의 복수이고, 주인공 휴 글래스는 인디언 문화를 이해하고 자연 속에서 살아남는 능력을 가진 인물로 그려집니다. 반면 탐욕으로 움직이는 피츠제랄드는 자연 앞에서 오히려 무력한 모습을 보입니다. 저는 이 대비가 단순히 선한 자와 악한 자의 구도가 아니라는 점에서 흥미로웠습니다. 영화는 영미계 백인 중심주의라는 미국 사회의 주류 이데올로기를 조용히 해체하는 방식으로 서사를 구성합니다. 글래스가 혼혈 아들을 위해 끝까지 싸우고, 마지막에 피츠제랄드를 강에 떠내려 보내며 "신에게 맡기겠다"라고 말하는 순간, 실제 판결은 인디언 부족이 내립니다. 그들이 판관이 되는 것입니다. 엔딩에서 글래스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오픈 엔딩도 의미심장합니다. 이냐리투는 인종적 갈등과 혼종성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음을 관객에게 직접 묻는 방식으로 영화를 닫습니다. 이 영화 안에서 인디언의 존재는 흥미롭게도 자연과 동일시됩니다. 글래스의 죽은 아내는 자연적 섭리의 전령처럼 반복해 등장하고, 눈보라 속에서 글래스를 살려내는 인디언은 자연 안에서의 지혜를 상징합니다. 이 장면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데루수 우잘라에서 몽골리안 원주민이 러시아 장교를 설원에서 구해내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원주민의 자연적 지혜가 문명인의 이성을 구한다는 메시지가 겹쳐집니다. 다만 여기서 제가 다소 불편하게 느꼈던 지점이 있습니다. 이 영화가 인디언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는 건 맞는데, 그 과정에서 인디언을 자연과 일치된 신화적 존재로 그리는 방식이 또 다른 형태의 신화화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인디언을 인간의 영역이 아닌 자연의 영역에 배치하는 시선은 찬사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들을 현실 바깥에 놓는 방식일 수 있거든요. 영화의 형식이 그 메시지를 의도치 않게 희석시킨 면이 있다고 저는 봅니다. 영화 제작 방식과 관련해, 아카데미상 심사 기준인 시각효과, 촬영, 연출 부문은 독립적으로 평가됩니다. 이 영화가 촬영상을 수상한 것은 에마누엘 루베즈키의 자연광 및 롱테이크 활용이 기술적으로도 높이 평가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영화의 실화 원형인 휴 글래스의 생존 사례는 미국 개척 시대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이냐리투는 이를 바탕으로 인종과 자연이라는 주제를 겹쳐 쌓았습니다. 미국 내 원주민 역사와 문화에 대한 더 깊은 맥락은 스미소니언 국립 아메리칸 인디언 박물관의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는 생각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고통과 분노를 표정과 몸짓만으로 전달하는 장면들이 많은데, 저는 솔직히 처음에는 그 연기가 지나치게 육체적인 고생에만 집중하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I'm already dead"라는 짧은 대사 하나가 이 인물 전체를 설명한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가진 특유의 고요함이, 그 모든 처절한 육체 연기 안에 살아 있었습니다. 레버넌트는 복수극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 자연과 인간, 문명과 야생, 백인 중심주의와 혼종성이라는 여러 층위의 질문을 쌓아놓은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그 설원 이미지가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복수에 성공했지만 카메라를 바라보는 글래스의 눈빛이 '그래서 이제 뭐가 해결됐느냐'라고 묻는 것 같아서요. 이냐리투가 던진 질문의 무게가 그 눈빛에 담겨 있었습니다.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으셨다면, 복수극이 아니라 한 인간이 '이미 죽은 자'로서 세상을 걸어 나가는 이야기로 보시길 권합니다.